나는 호주워킹홀리데이에서 만난 일본신랑을 따라 워킹홀리데이 기간이 끝나자마자 한국이 아닌 일본으로 바로 입국을 하였다. 그리고 입국 후 5개월이 지나서야 가족에게 일본으로 왔음을 알렸다. 그사실을 알고난 가족들은 난리가 났고 한국으로 되도록 빨리 일본생활을 정리하고 들어오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이미 동거를 시작해 얼마되지 않은 때라 가족의 반대 따위는 무시하고 그대로 일본에서의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러는 동안 유치원을 다니고 있던 조카들은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중학교를 입학하고 고등학생이 되어갔다. 엄마 아빠는 내가 일본에서 일본남편과의 깨볶는 생활을 하는동안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아프고 때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같은 문화와 음식과 공기를 마셔가며 같은 정서와 같은 기억을 공감하며 살아나가는 틈에 나는 어느 한 순간 쑥 혼자만 빠져나와 내가 하고싶은것만 해가며 그렇게 가족들과의 틈새는 벌어져만갔다. 내 가족들은 때론 아프면서 때론 힘들어하면서 그렇게 지내는 동안 나 혼자만 개인플레이를 하며 나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믿으며 꼭 이곳에서 뭔가를 이루어 가족의 자랑거리가 되어보고자 일본어학교와 전문학교를 다니며 지역명문이라는 오사카대학교의 대학원에 연구생으로 입학도 하였다.
난 그게 나를 위해서도 가족을 위해서도 잘된일이 될거라 믿고 그렇게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여기의 생활에 치이고 적응을 못하는 나를 발견하면서 어느순간 가족과 부모님을 지독히도 그리워하게 되었으며 내나라 정서를 그리워하기에 이르렀다. 대학원 공부는 수월치 않았고 종내는 정규학생시험에서도 떨어져 낙동강 오리알신세가 되어서 나는 더욱더 절망하였다. 그리고 찾아온 우울증...
우울증을 앓고나서부터 더더욱이 내나라 내가족이 그리워졌고 후회는 이미 늦어버린 때가 되어버렸다.
난 내가 필요할때만 가족을 생각하며 그리워했지만 부모의 마음은 또 그렇지도 않았는지 본인들이 힘들어 질때도 아플때도 변함없이 내 안부를 묻고 연락을 기다리던 부모님이 었다.
하지만 난 정작 내가 필요할때만 부모님을 찾고 한달에 한 번 겨우 할까말까하게 연락을 하고 하루하루를 의미없이 지내었다.
그러던중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빠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병원에 가보니 우울증에 알콜성 치매라고 하였다. 엄마는 이미 심장질환과 고혈압, 당뇨를 앓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경제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건 하나도 없음을 깨닫고 난 좀 더 깊은 우울감의 수렁텅이에 빠져나아가기만을 했다.
전화로 한마디 위로의 말 조차 거는것도 염치 없어 난 연락을 거의 하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에 아빠의 증세는 지금도 나빠져만 간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이 이런것일까. 눈을 뜨고 밥을 먹고 하루종일 누워있으면서 한국의 가족들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줄 수 없다는 현실이 나의 뒤통수를 때린다.
아무리 먹고살기 힘들어도 같은 하늘아래 한 번씩 가서 부모님 얼굴 들여다보며 상태를 보고 형제자매들과 같이 고민을 하고 걱정을 하고 대책을 마련하는것 어느것도 난 할 수 없다. 이제서야 난 뼈저리게 후회를 하고 있다. 국제결혼이란 부모에게 내 가족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불효이고 이기적인 선택이었다고.